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군 6진 (문단 편집) == 4군의 개척 == 세종 14년(1432년), 건주위(建州衛) 추장 [[이만주]](李滿住)가 여연군을 침공하자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도절제사에, 김효성을 도진무(都鎭撫)에 임명하여 15,000명의 병력으로[* 당시 이 병력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선발한 정예 병력이었다.] 이만주의 여진군을 격파하게 했다. 이만주를 정벌한 후 최윤덕은 세종에게 '이 지역은 강계나 여연과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 방비에 어렵다'는 장계를 올리니 세종은 두 군의 중간지점에 새로 군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세종 15년(1433년) 여연군과 강계부의 중간지점인 자작리(慈作里)에 성을 쌓아 이를 [[자성군]](慈城郡)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종 18년(1436년)에는 여연군 동쪽 압록강 남안의 상무로보(上無路堡)에 만호를 두었다. 자성군의 설치로 강계와 여연 사이의 연결이 확보되었으나 이 지역으로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세종 19년(1437년), 세종은 평안도도절제사 이천에게 압록강 너머의 여진족을 정벌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천은 오미부(吾彌部)와 [[오녀산성]] 등 압록강 너머의 여진족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여진족 소탕을 성공적으로 끝내자 세종 22년(1440년) 상무로보 일대에 무창현(茂昌縣)을 신설한 후 1442년 무창군(茂昌郡)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세종 23년(1441년)에는 여연군과 자성군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했다. 세종은 기존에 있었던 여연군과 새로 설치한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총 4군을 강계부 소속으로 두었다. 그러나 4군과 갑산군 사이의 압록강 상류 지역은 방어 대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여전히 여진이 침입했다. 이에 세종 23년(1441년) 무창과 갑산의 중간 지점에 삼수보(三水保)를 설치하여 세종 28년(1446년) 삼수보를 삼수군(三水郡)으로 승격시켜 무창과 갑산의 연결을 확보하고 압록강 남안의 전 지역을 영토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